"가서 일한 것 밖에 없어요. 진짜 가서 열심히 일한거 밖에 없거든요. 이러면 안되죠. 진짜 이러면 안돼요. 나같은 사람 또 나올꺼예요, 자꾸 이러면. 삼성 그러지 마요. 진짜 그러지 마요. 이게 뭐야. 다 바보같이 살아야 되잖아요.

아니 그러면 그런 화학물질 쓴다고 말을 해줘야죠. 왜 바보같이 사람을...답답해요. 또 내가 내일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살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고...그러니까 진짜 이러지 마요. 안전교육하고 그 물질이 위험하다고 말해요. 산재 인정해주세요."

방금 전 어머니 김시녀 씨가 '이제 그만 됐다'며 마이크를 뺐기까지 혜경 씨는 근로복지공단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려 힘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진짜 이러면 안돼요. 복지공단 나와요. 나와! 복지공단 나와!"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한혜경 씨가 흐느껴 울었다. 하지만 뇌종양 수술로 눈물샘이 제거돼 빰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소리도 없고, 눈물도 없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마이크가 혜경씨의 세 번째 산재 심사청구 기자회견을 진행하던 사회자에게 건네지고 구호를 외치려던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들은 차마 구호를 외칠 수 없었다. 대신 눈시울이 붉어진 활동가들은 대신 휠체어에 앉아 허리가 푹 꺾인 채 울고 있는 혜경 씨에게 "혜경씨 힘내세요"라고 외쳤다.

"구호 외칠까요? 아..저...구호보다 우리 한번 외칩시다.
혜경씨 힘내세요!"

29일 서울 영등포구 근로복지공단 앞에 온 한혜경 씨의 손에는 산재 재심사 청구서가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 김시녀 씨는 "오죽하면 어젯밤에 우리 딸이 잠꼬대까지 했다"며 "내가 삼성에서 남들 밥먹을 시간에도 열심히 일했는데 왜 병 신생활을 해야 하느냐고. 왜 나는 걸을 수 없느냐고 했다"고 말했다.

한혜경 씨가 지난 1996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LCD 공정에서 한 작업은 솔더(Solder)크림을 녹여 주걱으로 떠 회로기판 위에 올리는 일이었다. 회로기판에 크림이 너무 많이 묻어 있거나 손에 묻으면 유기용제인 IPA(이소프로필알콜)로 닦았다. 작업을 위해 솔더크림을 녹였다 굳히는 일을 반복할 때는 특히 납 냄새가 진동을 했다. 솔더크림은 납과 주석 분말을 끈적한 액체 상태의 납땜 용제와 혼합한 일종의 크림 상태의 납이었다.

3조 3교대로 8시간, 때로는 12시간씩 야간근무까지 하던 입사 3년째(1998년)부터 월경이 없어졌고, 더는 일할 수 없을 정도의 잦은 고통 때문에 2001년 8월 회사를 퇴직했다. 퇴직 후 마트에서 과일판매 아르바이트, 출판사 책 편집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몸은 까닭없이 아팠고, 감기를 달고 다니더니 걸음걸이도 이상해졌다. 퇴사 후 2~3년이 지나자 시력이 급격이 나빠졌고, 길가에서 자주 넘어지기까지 하자 병원을 찾았다. 2005년 10월 뇌종양 진단을 받고 수술을 했지만 시력.언어.보행 모두 1급 장애인이 돼 강원도 춘천의 한 재활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가장인 어머니 김시녀 씨는 5년 동안 딸을 간병하느라 제대로 벌이를 하지 못해 작년까지 혜경 씨 모녀는 기초생활보조를 받았지만, 올해는 이마저 끊겼다. 근로복지공단은 이미 올해 1월 역학조사 결과 "뇌종양 발병원인이 (삼성전자)작업환경과의 관련성이 있다는 근거가 없"다며 산재 불승인 판정을 내리더니, 재심사 청구에 대해서도 지난 8월 불승인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이번엔 세 번째로 고용노동부 재심사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됐다.

재활치료비 조차 막막한 상황에서 혜경 씨 모녀는 이번 세 번째 산재 인정 희망을 놓지 않고 있다. '반올림'의 이종란 노무사는 "병든 노동자에게 최소한 산업재해라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국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서 "고용노동부 재심사위원회가 훨씬 더 나은 판정을 내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시녀 씨는 기자회견 내내 "밥값하는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근로복지공단.노동부 직원 여러분, 제발 진실되게, 사람처럼, 양심있게 사세요"라고 쓰인 피켓을 놓지 않았다.

"수도 없이 드나든 근로복지공단에 또 왔습니다. 춘천에서 서울까지 오기도 벅찬 걸음이지만 절망만 부여잡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오늘 죽을까 내일 죽을까, 다음달 병원비는 어떻게 내야 하는 걱정을 하고 있는 심정은 생각하지 않고 이러는 나라가 세상에 대한민국 밖에 더 있습니까? 강아지 새끼가 떠돌아 다녀도 보호해주고 주인 찾아주면서 삼성에서 일하다 병들었는데 개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게 세상에 말이 됩니까?"


작성일: 2010-11-01